벌써 여름이었다. 나미나라공화국에 입국하기 위해 승선하는 대부분의 승객들이 선글라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지참했다. 강바람이 선선했고, 내리쬐는 햇볕은 가볍게 이는 흙먼지와 섞이고 있었다. 어딜 가나 인파가 넘쳤다. 반팔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젊은 남녀와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나들이 가족,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그 사이를 한가롭게 거니는 노부부, 심지어 외출복을 차려 입은 애완견들까지. 그 즐거운 곳에서 시커먼 작업복을 차려 입고 한창 비지땀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새와 꽃, 나무와 구름……. 강우현 남이섬 사장이 시멘트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 사람들에게 물었다. 

“강우현 사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사람들은 그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일관된 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이면 열,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아내의 말을 빌려 그를 천재라고도 했다.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를 정리하면 그는 ‘엉뚱하고, 특이하고, 아이처럼 천진한 구석이 많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통통 튀는 탱탱볼 같은 사람, 그는 한 곳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나는 말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발랄함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다. 그는 설계부터 인테리어까지 직접 맡아서 했다는 남이섬 내 건물 한 채를 보여줬다. 호숫가가 한눈에 보이는 목조 카페와 중국 현지 주방장이 요리하는 차이니스 레스토랑, 동양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와 천장이 높아 탁 트인 연회장을 차례로 안내하면서 그는 걷기와 뛰기 사이의 걸음으로 일층과 이층을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옮겨 다녔다. 도올 선생의 아내가 강우현 사장을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강우현은 항상 변한다. 만날 때마다 항상 예전과 다르고 고착된 데가 없다.” 

언제 어디서든, 어느 상황에서나 아무렇게나 적응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고집하는 것이 한 두 가지씩 생기는데, 그런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독특하다고 여기는 것도 이 알다가도 모르는 예측 불허함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강우현 사장은 상당히 유별난 사람일수도 있겠다. 여기서 그의 유년시절을 한번 돌이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0일간의 새벽 별

그의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들에게 100일 동안 새벽 별을 보여 주었다. 당시 새벽 별의 정기를 받은 아이는 총명해진다는 이야기가 듣고나서였다. 신화에서나 들었을 법한 이러한 이야기를 실제로 행한 분이 그의 어머니다. 말이야 쉽지, 매일 새벽에 자고 있는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아침을 맞이한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분이 손주를 안고 똑같이 해보기로 마음먹었다가 이틀 만에 춥고 졸려서 그만 뒀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강우현 사장의 생일은 1953년 10월 24일,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쌀쌀한 초겨울이었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었단 소리다. 

그는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도곡리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전깃불이 안 들어오는 그 외진 동네에서 어머니는 가족을 모두 대학에 보낼 만큼 열정적이었다. 매포에서 유일했던 다섯 명의 대학졸업자가 강우현 사장의 아버지와 형제자매였다. 논 팔고, 소 팔고, 산 팔면서 식구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는 어쩌면 그중에서 가장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어머니가 아이들을 강압적으로 내몰기만 하는, 요즘 시대의 치맛바람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강우현 사장이 스스로 묻고 답을 한다.

“엄마가 제 할 일을 이래라 저래라 시키며 키웠다면, 저의 이런 호기심 많은 성격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그랬다면 웬만한 일은 아예 엄두조차 못냈을 거예요.”

그는 “이 나이에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했다. 지금도 ‘우리 엄마’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데, 어렸을 때는 오죽이나 ‘엄마, 엄마, 엄마’를 입에 달고 살았을까?  그는 대놓고 자신을 ‘마마보이’라고 소개했다. 

“저만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일까요? 저는 엄마 생각만 해도 마냥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 엄마가 지금은 곁에 없어서 더 그립고, 그런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아쉬웠어요. 제가 나미나라공화국에 사랑과 생명을 테마로 한 ‘어머니나라 테마파크’를 계획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알아주지 않는 그림은 그리지도 않았다는 강 사장다운 발상이다. 

우리 엄마는 생각 덩어리

그는 사방팔방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해서 도구가 없을 때는 땅바닥에도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물 위에도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선생님은 언제나 어머니였다. 한번은 그런 어머니도 늘 그림만 그려대는 아들에게 공부는 안하고 만날 그림만 그리냐며 핀잔을 줬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저는 하나를 잘 하면 열 개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래를 계획하기 보다는 눈 앞에 있는 일에 적응하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강우현 사장의 불평불만 없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삶의 자세다. 미술대회마다 나가서 상을 휩쓴 것도 그림을 그리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부모님의 생각을 깨기 위한 전략 아닌 전략이었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미술대회가 그에게 온갖 미술상을 안겨줬다. 어머니는 능력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반대가 심했던 서울 유학시절에 어머니로부터 미술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지원금을 받아낸다.

“엄마는 무슨 일에 부딪히건 걸리는 게 별로 없는 분이었습니다. 지혜 주머니, 생각 덩어리에 그야말로 천부적인 아이디어 뱅크였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눈썰미와 손재주는 놀라웠습니다. 창의력의 실체를 생활 속에서 시연해 주신 제 스승이시죠. 그런 분이 우리 엄마였습니다. 엄마의 발상법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었고, 덕분에 저 또한 저만의 사고를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삼각형 또는 원형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려달라는 말에 앞 뒤 다 자르고 단번에 ‘물’이라고 대답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어서도 그렇거니와 ‘물’은 강우현 사장이 가장 닮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은 낮은 곳에 머물면서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물은 형태가 바뀌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물의 특징이 제 인생을 가장 강렬하게 지배하는 좌우명이 되고 말았지요. 제 인생은 물입니다. 제 그림도 물이고요. 제 모든 사회활동도 물입니다.” 

노자는 ‘물은 사람들이 있기 싫어하는 곳에 있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는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는 의미로 삼각형에 들어가면 삼각이 되고, 원형에 들어가면 원이 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강우현 사장도 물처럼 수시로 모양이 바뀌고, 이동할지라도 항상 가장 그다운 것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 곳에 있는 자신의 순수한 어린 시절로 매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저는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면서 교내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활동영역을 전국구로 넓혀 ‘전국학생미술동우회’를 창단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것은 마음껏 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동경이 되고, 그 동경이 꾸준하면 언젠가 현실이 된다는 진리. 그는 그 절대 진리 안에서 유유히 순환하고 있었다. 

다시 해보면 되잖아
“끊임없이 새로운 짓을 벌이는 저를 보면서도 엄마는 언제나 긍정적이셨어요. 제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이러면 어때?  그럼 이러면?  이러면 어떻겠니?’라고 물어 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잘 안 되는 것’은 ‘다시 해보면 되는 것’이라고 배웠다. 어머니부터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결국 해 내셨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잘 됐거나 성공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어머니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일은 빨리 포기하거나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섰다.

 
흔히 ‘어머니의 은혜는 넓고 깊다’고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돌사탕처럼 단단한, 그러면서도 밀가루처럼 유연한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오래지 않아 쉽게 화합할 수 있었다. 

“엄마 곁에만 있으면 저는 온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 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삶을 이어가게 하는 모든 지혜와 아이디어는 엄마로부터 왔습니다. 엄마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지만 디자인을 전공한 저를 까무러치게 할 만큼 기발한 분이었으니까요.”

어머니가 고무찰흙으로 만든 동물인형들은 수준급이었다. 엄지손으로 몇 번 누른 것 같지도 않았는데, 흙덩이는 오리와 닭,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순식간에 핵심만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모든 것을 놀이하듯, 장난하듯 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부터 저는 작품을 할 때마다 반드시 엄마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엄마 이거 뭐 같아요?’ 그럼 엄마는 ‘~처럼’이란 표현을 많이 쓰면서 비유를 들어주셨어요. 엄마식 비유법과 상상력을 제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강우현 사장의 그림과 디자인도 대부분 단순하고 알기 쉬운 표정을 띠고 있다. 사물을 뒤집어 보고 옆에서도 보는 일, 아예 없던 걸로 치거나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들은 영재교육에서 흔히 쓰는 방법인데, 그는 이게 교육인지도 모르고 익숙해졌다.

강우현의 어머니
강우현의 어머니

“엄마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금새 다른 이야기를 꺼냅니다. 넘쳐 흐르는 생각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 대화방식은 우리 형제들이 엄마를 쏙 빼 닮았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 다음 이야기를 먼저 해 버려요. 자기 생각을 섞어서요. 그러니 보통 사람들처럼 주거니 받거니 식의 대화는 아예 불가능한지도 모릅니다.” 

왠지 모르게 산만해 보이던 그의 모습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도 떡’이 되고 ‘저렇게 만들어도 떡’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떡을 만드는 황금비율이나 절대공식은 무의미할 수 밖에. 엉터리 같이 보일 수 있어도 떡만 나오면 그만이었다. 다음에 왔을 때에는 더 독창적인 것을 볼 수 있겠지? 나미나라공화국을 출국하면서, 그가 쭉 엉터리로 살길 바랐다. 그가 재미있고, 보는 우리가 재미있는데, 안 될 것은 또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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