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어머니_LEADER's MOTHER

빗자루와 걸레 하나로 시작한 삼구아이앤씨를 국내 1위의 선진종합아웃소싱기업으로 성장시킨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이 서재에서 앨범을 하나 꺼내서 누렇게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여인의 사진, 그는 “이 아름다운 여인이 내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의 어머니"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훌륭하고 자랑스럽게 성장한 아들을 두고도 행복하지 아니할까? 여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아들의 마음이 있다. 지난 세월의 상처가 아무리 깊다 해도 어머니의 상처는 이미 티끌 하나 없이 아물었으리라."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의 어머니"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훌륭하고 자랑스럽게 성장한 아들을 두고도 행복하지 아니할까? 여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아들의 마음이 있다. 지난 세월의 상처가 아무리 깊다 해도 어머니의 상처는 이미 티끌 하나 없이 아물었으리라."

강민주 사진 김성호, 배수한, 삼구아이앤씨

“어머니의 고된 삶은 모두 제 탓”이라는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가로등도 없어 깜깜한 새벽 4시, 어머니는 한참 잠에 빠져있는 어린 아들을 흔들어 깨운다. 잠자리에 든 지 불과 서너 시간밖에 되지 않은 열여섯 살짜리가 깨운다고 벌떡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그래도 6시까지 공장에 닿으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다. 어머니는 칭얼대는 아들을 때려서 깨운다. 그렇게 아침밥도 못 먹고 떠밀려 집을 나선 아이는 한 시간 반 동안 산길을 걷는다. 구자관 대표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매일 아침이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는 어머니를 탓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입이 무거운 사람에게 우리는 그 사람의 입이 천근 같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과묵하시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잠을 못 깨서 어머니를 애먹였는데도 어머니는 제게 잔소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어요.

하루 중 아침이 제일 어두컴컴해

“남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퇴근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야간 학교에 갈 수 있었으니까요. 남들이 8시에 출근하면 저는 6시까지 공장에 나갔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학교에서 10시까지 공부하고 나면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갔습니다. 없는 살림에 변변치 않은 밥상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면 12시나 돼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겠어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미웠지요. 나중에 어머니께서 고백하시길 ‘내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았지만 새벽 4시에 너를 깨워 공장에 보내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고된 삶이 모두 제 탓이라며 죄송한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제가 우리 어머니 가슴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모릅니다. 당시 야간 고등학교는 공부를 못하는 깡패들 아니면 가난한 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어요. 그래서 학교 청소는 모두 힘없는 근로 학생들이 도맡아서 했습니다. 밤 10시에 수업을 마치고 청소를 한 후, 산길을 걸어서 집에 오면 녹초가 됐죠. 그렇게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자식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는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지금은 수제비가 해물, 야채가 들어간 웰빙 식품이지만 당시엔 건더기라고는 거의 없는 멀건 국물이 다였어요. 그런데 제가 국물을 싫어했거든요. 국물을 조금 마시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어머니께서 걱정을 더셨을 텐데, 어머니는 당신의 몇 점 없는 수제비를 제게 다 건져주고는 제가 남긴 소금 국물까지 들이켜 배를 채우셨습니다.”

 

껍질도 아까워서 통째로 빻은 밀이었기에 건더기를 입안에 넣으면 혀가 깔깔했다. 열 식구가 먹는 수제비에 멸치 한두 점을 넣고 끓인 국물은 비린 맛은커녕 짠맛만 났다. 그 소금이 혈압에 얼마나 안 좋은지를 생각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머니 건강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하고 나서였다.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은 어머니가 혈압 때문에 쓰러져서 일찍 돌아가신 것이 꼭 제 잘못만 같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도 혈압으로 쓰러지셔서 반신불수가 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온 정성을 다해 간호하신 덕분에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됐지만, 여전히 몸이 불편하셨죠. 그러던 어느 겨울날, 길이 미끄러워 넘어지신 어머니는 설상가상으로 대퇴부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골다공증으로 뼈가 약해지잖아요. 오랫동안 깁스를 하고 계셔서 그런지 나중에 깁스를 풀어도 다리를 굽히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용변을 보셨을지 생각하면 저는 지금도 가슴이 찢어집니다. 좌변기도 없던 시절에 멀쩡한 사람도 불편한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시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자식이 되어서 어떻게 단 한 번도 어머니의 불편함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는지……. 그렇게 고통스러우셨을 어머니는 결국엔 일하는 사람을 시켜 다리를 구부리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나무 용변기를 짜왔습니다. 저희 남매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힘들다는 내색 한번 보이지 않으셨으니까요.”

어머니의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그는 아직도 어머니께 용서를 구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왜 지나고 나서야만 알 수 있는지,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마음에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은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 얘기를 꺼낸다. 그리움에 사무쳐서다.

 

아버지의 노름 버릇을 고친 지혜

“입이 무거운 사람에게 우리는 그 사람의 입이 천근 같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저희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과묵하시다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아침마다 잠을 못 깨서 어머니를 애먹였는데도 어머니는 제게 잔소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어요.”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의 어머니가 얼마나 말을 아끼는 분이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서 매일 밤을 바깥에서 노름으로 지새우다가 아침에 귀가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여자는 남자가 무슨 짓을 해도 밥상을 차려주는 시대였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잘한 것도 없으면서 아침마다 당당히 집에 들어와 밥상을 기다렸다. 또 그런 남편일지라도 어머니는 삼시 새끼 아버지의 진짓상을 차려 올렸다.

“그날도 아버지는 밤새 노름을 하고 아침에 들어와서 어머니께 밥상을 차려오라고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군소리 없이 밥을 지었죠. 그리고 속이 뒤틀리는데도 진짓상을 차려서 아버지 앞에 조용히 내려놓고 방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아버지가 크게 노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밥그릇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 밥이 아닌 화투장이 들어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집안의 가장인데, 자존심이 크게 상한 아버지는 순간 화가 난 것이었겠죠. 부끄러운 마음도 있으셨을 테고요. 결과적으로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노름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어머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도 아버지의 노름버릇을 고쳤습니다. 말싸움 한번 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현명한 분이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난 분이었다. 어머니는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지만, 그들의 책과 글씨를 어깨너머로 보고 독학할 정도로 명석했다. 아궁이를 땔 때 쓰던 부지깽이로 부엌의 진흙바닥에 글자를 써가며 연습해서, 한자투성이였던 옛날 신문을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는 손수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다. 일례로 어머니의 남자 형제이자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의 외삼촌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택시회사 ‘경성택시’를 세울 만큼 능력 있는 사업가였다. 그가 기억하는 외가식구들은 타고난 재주도 많거니와 어머니는 지혜로움까지 겸비한 여성이었다.

 

“강인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던 어머니의 속마음을 엿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 조그만 강아지를 키웠는데, 큰소리로 짓지 말고 늘 상냥하고 친절한 강아지가 되라고 ‘카인드(Kind)’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카인드를 예뻐하고 돌보는 것은 모두 우리 남매였기에 저희 남매는 어머니가 카인드를 예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카인드를 쓰다듬거나 예쁘다고 표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누가 집어갔는지, 집을 나갔는지 카인드가 없어지자 어머니는 장장 나흘 동안이나 근방 2km정도 되는 거리를 뛰어다니며 카인드를 찾아 나섰습니다. ‘카인드’라는 영어 발음이 안되니까 ‘가인아, 가인아’라고 하루 종일 부르시면서요. 어찌나 열성으로 찾고 다니셨는지 저희 가족은 심지어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이 잘못돼서 그러시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아들의 마음

가장 가까운 가족들도 속마음을 모를 만큼 어머니는 표현을 아꼈다.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이 있었던 시절, 그런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고도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이 들려주는 어머니 일화는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어머니는 자식 셋을 일찍 보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을 잃고, 딸 하나를 더 가슴에 묻었습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단명(短命)이 이상할 게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산모가 성치 않으니까요. 여자들이 만삭의 몸으로 연중 가장 힘들다는 춘곤기에 보리를 찧습니다. 그렇게 마당에서 힘을 써가며 절구질을 하는데 당연히 산통이 시작되지요. 그러면 방에 들어가서 아이를 낳고, 직접 탯줄을 자르고, 뜨거운 물을 끓여서 아이를 닦아 눕혀놓으면 몸조리할 틈도 없이 다시 마당에 나와서 빻은 곡식으로 밥을 지어 가족을 먹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누구보다 안타깝고 보고 싶지만, 그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70대 재벌 총수들이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그 ‘젊음’이 그에게는 전혀 부럽지 않다. 그러나 그토록 잔인하고 힘들었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 덕이라는 것을 안다. 고기 맛이 나는 라면 국물은 행여라도 좋아할까 싶어 자꾸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말씀하신 어머니, 기와가 다 깨져서 그릇이란 그릇은 다 꺼내 빗물을 받아가며 텅 빈 집을 지켰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는 숱한 위기의 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을 딛고 일어나 설립한 삼구아이앤씨는 국내 아웃소싱업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훌륭하고 자랑스럽게 성장한 아들을 두고도 행복하지 아니할까? 여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아들의 마음이 있다. 지난 세월의 상처가 아무리 깊다 해도 어머니의 상처는 이미 티끌 하나 없이 아물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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